INTRO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전문가의 이야기는 어딘가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오제욱 대표의 이력서를 보면, 그 안정감과는 정반대의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LG상사 신사업팀에서 시작해 골프존, SBS콘텐츠허브를 거치고, 콘텐츠 거래 회사를 차렸다가, 버추얼 휴먼 스튜디오로 100억 투자를 유치하고, 다시 컨설팅 회사로. 무역에서 골프 시뮬레이터로, 한류 콘텐츠로, AI 가상 인간으로, 영역을 가리지 않고 옮겨 다닙니다. 이직만 열 번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모든 점프가 사실은 하나의 일을 변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늘 '본질을 생각하면 다 통한다'고 말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가설을 세우고, 그게 진짜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일. 이 인터뷰는 도메인을 끊임없이 갈아타면서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그의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뷰 네이게이션
1. 50개 사업계획서를 만들며 무역상사에서 배운 것
2. 한류의 정점, 그 파도 위에서 시도한 첫 창업
3. 버추얼 휴먼, 그 가능성의 시작
4.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실험가
5. 한국판 페이팔 마피아를 꿈꾸며
50개의 사업계획서를 만들며 무역상사에서 배운 것
Q. 제가 만난 사업개발자분들이 워낙 다양한 일을 하셔서, 늘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요. 만나는 분들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세요?
한마디로 짧게 소개할 때는 '비즈니스 아키텍트'라고 해요. 코어에서 시작해 건물을 어떻게 완성해 나갈지 그 전체를 함께 얘기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뜻이에요. 제 사업을 만들지만 늘 주변 분들과 시너지를 내면서 발전시키다 보니 그런 표현이 맞더라고요.
이 표현은 디오비스튜디오 사업을 하면서 공부하다 논문에서 발견했어요. 사실 그 이전에는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사업을 했다기보다 본능적으로 끌렸던 것 같아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좋았고, 상상력에서 시작해 콘텐츠가 되고 그게 돈이 되는 게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그렇게 재미와 본능과 기회를 따라가다 어느 순간 제 행동에 패턴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다 옳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래서 신사업 개발을 좀 더 아카데믹하게 접근하게 됐고, 케이스 스터디와 해외 논문을 많이 보다가 '아 내가 하는 일과 정체성이 비즈니스 아키텍트에 가깝구나' 하고 정리를 하게 되었죠.

Q. 비즈니스 아키텍트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참 궁금한데요, 지금까지 이직을 열 번 하셨다고 들었어요. 전체 히스토리를 짧게라도 한 번 쭉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첫 회사는 LG상사, 지금의 LX인터내셔널이었어요. 운 좋게 신입사원인데 CEO 직할 조직, 신사업 추진 TFT에 들어갔죠. '그룹이 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라'가 미션이었어요. 그런데 같이 입사한 동기와 너무 비교를 당했어요. 그 친구는 경영학을 복수전공해서 케이스 스터디도 많이 돼 있고 사업개발 훈련이 어느 정도 된 친구였거든요. 저는 언어를 전공해서 하고 싶기만 했지 방법은 몰랐어요.
그래서 그때 사업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를 거의 강박에 가깝게 훈련받았어요. 니치한 시장을 찾는 것도요. 그룹이 안 하는 일을 가져가야 하는데, 하나 가져가면 "이건 GS가 비슷한 걸 하잖아", 농업 관련을 가져가면 "농민들 트윈타워 앞에서 시위하는 거 보고 싶어?", 신박한 걸 짜가면 "이거 연간 파이가 커봐야 100억인데 대기업이 100억짜리를 하냐?" 그렇게 50개가 넘는 사업계획서를 보고했는데, 대표이사께 올라간 건 딱 하나였어요.
그 하드 트레이닝이 제 사업개발의 기초가 됐어요. 다만 LG상사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컸어요.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기회가 닿아 골프존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Q. 골프존에서의 시간은 어떠셨나요?
제 커리어에서 제일 행복했던 4년이에요. 지금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요. 중국 법인을 만들기 위한 시장조사부터 법인 설립 계획, 실제 설립, 이어서 대만 사업개발, 주재원으로 나가 현지 세팅까지 했어요. 사업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그때 배웠어요.

팀장님이 많이 믿어주셔서 대만을 혼자 1년에 절반을 출장 다니며 수많은 테스트를 했죠.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층고를 레이저로 재고, 대만 법을 연구하고, 도시별·연령별 창업 패턴까지 들여다보고. 하드웨어, 무역, 온라인 커뮤니티, 로컬 스토어 마케팅까지 혼자 다 공부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재밌었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휘젓고 다닌 시절이었죠.
그러다 신임 CFO님이 회계팀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이제 공격적으로 사업개발을 할 때가 아니라 그룹 IPO를 준비할 때니, 해외를 제일 잘 아는 제가 회계팀에 필요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여전히 사업개발이 더 하고 싶더라고요.
Q. 그래서 또 이직을 하신거군요. 이후 선택은 골프존, LG상사와는 전혀 다른 콘텐츠 비즈니스인데, 이것도 우연한 기회였을까요?
콘텐츠 비즈니스는 제가 제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분야였어요. 사실 저는 가수 지망생이었거든요. 대학 때 매니지먼트 전속계약까지 했었어요. 뮤지컬도, 아카펠라 밴드도 했고요. 재능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릴 적 칭찬이 임팩트가 강하잖아요. 그래서 콘텐츠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 있었어요.
방송 쪽을 늘 보고 있었는데 워낙 안 뽑아요. 그런데 퇴사 후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오픈하자마자 첫 제안이 SBS콘텐츠허브였어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죠.
Q. 일은 기존에 하던 것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셨나요? 콘텐츠를 좋아하긴 했어도 일로 경험해보진 않으셨잖아요.
본질은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는 일은 결국 사업개발이니까요. 가치를 만들고, 타깃이 누군지 이해하고, 그 타깃의 페인포인트가 뭔지 알아서 해결해주면 더 큰 가치가 된다. 그 기초 로직을 LG상사에서 잘 배웠거든요. 본질을 생각하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류의 정점, 그 파도 위에서 시도한 첫 창업
Q. SBS에서 한류의 정점을 경험하셨다고요.
2014년에 중국에서 한류가 터졌어요.〈상속자들〉, 〈별에서 온 그대〉, 〈닥터 이방인〉, 〈런닝맨〉이 폭탄 떨어지듯 중국 시장에 영향을 미쳤죠. 당시 '현상급 콘텐츠'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였는데, 그게 다 SBS 콘텐츠였어요. 졸지에 중국에서 저는 통역도 하고 계약서도 다루는 사람이 됐어요. SBS 그룹에서 중국어 하는 사람 중 제일 고참이었거든요. 임원·회장단이 중국 고위 간부와 회의할 때 의전과 통역을 다 하고, 가장 신중해야 하는 계약 협의도 제가 했죠.
그러니 중국 측에서는 저를 굉장히 높은 사람으로 봤어요. 〈런닝맨〉은 제가 아는 한 중국에서 한국 콘텐츠가 가장 성공한 사례이고,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은 돈을 받은 콘텐츠이기도 해요. 그 대형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다 보니 제 앞이 고속도로처럼 확 열렸어요.

그때 중국 방송사 임원이 그러더라고요. "네가 창업하면 일을 몰아줄게." 저는 늘 윈윈 구조를 짜려고 노력했는데, 중국 파트너들이 그걸 알아본 것 같아요. '얘는 자기에게 유리한 게 아니라 우리를 배려하는 결정을 하겠다'고요. 그래서 세운 게 티그라운드, 2015년 3월이에요. 창업하고 두 달 반 만에 중국에서 매출이 바로 꽂혔어요.
Q. 일을 몰아준다는 약속을 지켜주셨네요.
그분들은 저한테 맡길 일이 쌓여 있었던 거예요. 솔직히 제가 잘한 게 아니라 그만큼 중국 시장이 좋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한국 웹툰을 중국에 파는 딜을 중재하게 됐어요. 한 중국 대기업이 사고 싶어 했는데 협상이 꼬여 있었거든요. 제가 양쪽을 다시 연결했더니, 결과적으로 판매자는 처음 제시받은 금액의 3.5배를 받았고 중국 측도 만족했어요. 그런데 이게 한국 웹툰이 중국에서 멀티 포맷으로 개발되는 권리가 수출된 최초 사례였던 거예요. 그러자 네이버 웹툰, 다음 웹툰, 방송사들이 다 연락이 오기 시작했죠.

그때 확신했어요. 딜이 일어날 때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인데, 양쪽 입장을 다 이해하면서 타협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만족하면서 딜이 성사된다고요. 어떻게 보면 브로커죠, 콘텐츠 브로커. 우리나라에서 브로커는 안 좋게 보지만, 한 영화계 선배님이 저한테 "너는 헐리우드 스타일의 브로커야"라고 칭찬해주셨어요. 양쪽이 다 만족하는 브로커.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버추얼 휴먼, 그 가능성의 시작
Q. 그 흐름이 계속 이어졌나요?
아니요, 2017년 사드가 터지면서 중국이 완전히 막혀버렸어요. 국내 탑스타 초상권 딜로 백지수표까지 받던 시절이었는데, 한순간에 말그대로 정말 멘붕이었죠. 빠르게 1인 미디어로 피봇했다가 중국 정부 규제로 또 막혔고요. 그래서 중국을 과감히 버리고 국내 유튜브·MCN·V커머스 쪽으로 뭐든 닥치는 대로 했어요. 직원을 6명에서 3명으로 줄이고 손익분기를 겨우 맞췄을 무렵, 가족에게 큰 건강 위기가 찾아왔어요. 간병을 해야 하니 회사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죠.
결국 직원들을 다 떠나보내고 저는 재취업을 했어요. 미국 OTT 회사 ODK미디어 한국지사에서 중국 콘텐츠 소싱과 편성 전략을 맡았고요. 그 시기 제 멘탈이 많이 무너졌어요. 사드 전에는 제가 재벌이 될 줄 알았거든요. 중국 가면 공항에 리무진이 나오고 언론에 나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큰 실패가 연달아 오니까, 다 제 탓 같았어요.
Q. 그런 상황에서 다시 창업을 선택하셨다니, 저로선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의기소침해 있을 때, 친한 액셀러레이터 분이 "너 너무 아깝다, 다시 해보자"고 하셨어요. 그 말에 많은 힘을 얻었어요.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벌어진 고난들이었으니, 이제 다시 내 힘으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제 사업 아이템 중 하나가 버추얼 휴먼이었어요.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은 인기가 커질수록 그를 키운 회사의 힘은 약해지거든요. 주도권도 더 다양한 수익화 기회도 사라지고요. '얼굴이라는 IP를 회사가 소유하면 이걸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가설에서 시작했어요. 다시 해보자고 제안해 주셨던 엑셀러레이터분이 실제로 투자금 1억을 모아오셨고, 2020년 7월부터 제가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잘됐어요. 만 1년이 되기 전에 프리A로 30억, 4년간 100억을 유치했고 회사가 상도 20개쯤 받았어요. 광고를 그렇게 오래 한 사람이 아닌데도 대한민국 광고대상 금상을 받았고요. 윤여정 선생님 디에이징 광고로요. '나는 나를 증명해냈다'고 생각했죠.
Q. 디오비스튜디오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이었나요?
가상 얼굴을 분양하는 거예요. DOB는 Dream of Butterfly, 장자의 호접지몽에서 가져온 이름이에요. 디지털 세상이 아날로그보다 더 중시되는 시대가 이미 됐다고 봐요. 아날로그에서 우리는 몸이 늙고 피곤하고 돈도 유한한 비참한 존재지만, 디지털 세상에 접속하는 순간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그럼 가상세계에서의 얼굴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얼굴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옷 갈아입듯 얼굴을 갈아입는 시대요. 마침 메타버스 붐이 코로나 때 왔고, 제가 책을 쓰면서 '버추얼 휴먼'이라는 키워드를 선점했고, 이어서 AI 붐까지 와서 푸시를 세 번 크게 받았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도를 저부터가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Q.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빠르게 키워냈는데 잘되고 있는 회사를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너무 갈아 넣은 거예요. 항상성이 무너지면서 몸이 무너지고, 몸이 무너지니 멘탈도 같이 무너졌어요. 저는 원래 늘 밝고 도전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거든요. 문제가 계속 나와도 '포기하지 않으면 소생할 구멍은 항상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항상성을 잃어버렸어요.
저를 믿고 투자하신 분들께도 참 죄송했습니다. 건강 관리도 프로라면 잘 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제 역량을 넘어섰다고 판단하고, 이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저보다 잘할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맞다고 봤어요. 잘되던 사업이 저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빠르게 잘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정리가 됐어도 그 이후에 제 개인이 회복하는 데는 거의 1년이 걸렸네요. 다행히 작년 중순부터 다시 제 항상성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실험가
Q.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새로운 사업에 열정을 쏟는 대표님을 보면 기업가정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요, 대표님은 스스로 기업가정신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두 가지가 강한 것 같아요. 일단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무역으로 큰돈을 버신 분이라고 들으며 자랐어요. 박정희 대통령, 대기업 창업가들과 함께 식사하는 사진이 할머니 댁에 걸려 있었거든요. 그 모험담이 어릴 때부터 판타지로 남았죠. 그런데 아버지는 사업을 세 번 다 실패하셔서, 어머니가 마이너스 통장으로 저희를 키우셨어요. 그래서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또 하나는 관종 기질이에요.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 사업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SBS에서 한류의 정점을 맛봤을 때, 주변 인물인데도 후광을 같이 입는 그 영광에 완전히 매료됐거든요. 그래서 석사도 한류 경영으로 했어요. 이러한 기질과 바람을 토대로, 세상에 이로운 멋진 비즈니스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큰 사람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Q. 그럼 사업개발자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세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정말 많아요. 그런데 이게 타당한지, 기꺼이 돈을 넣어도 되는지 파악하고 실제로 실험에 옮기는 사람은 적거든요.
엑셀에 모든 가설을 나열하고 숫자를 넣되, 그 숫자가 근거 없는 숫자면 안 되잖아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시장조사를 꼼꼼히 하고요. 식당을 창업하려면 그 상권 골목에서 사람 수를 세야 하는 것처럼, 사업 모델마다 조사 방법론도 다르고요.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실제로 돈이 창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다 하는 것, 그게 사업개발자의 역할이라고 봐요. 타당한 가설을 세우고 그걸 검증해내는 실험가. 가설은 틀릴 때가 너무 많으니 지치지 않고 계속해야 하고요.

Q. 그럼 창업가와 사업개발자는 다르다고 보세요?
비슷하다고 봐요. 다만 창업가는 '내 것'을 만드는 의미가 크고, 사업개발자는 타인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차이 정도예요. 사업개발자가 느껴야 할 무게는 창업가에 준한다고 봐요. 의사결정을 잘못하면 회사가 위험해지니까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업개발자는 CEO의 스태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반드시 겸손해야 해요. 제 가설은 100% 옳을 수 없거든요. 아무리 확신이 들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레이어가 빠져 있어서 엉뚱한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피봇을 밥 먹듯 해본 사람으로서, 저는 '이거 틀렸을 거야'가 오히려 디폴트예요. 결국 고객이 지갑을 열어야 하는데, 그걸 예측하려고 무수한 가정을 조합하는 거니까요. 과학 실험에서 변수를 통제하며 반복하는 것과 로직이 똑같아요.
Q. 아카데믹한 공부도 강조하시는데, 자칫 이론에만 갇힐 위험은 없을까요?
그래서 늘 밸런스인 것 같아요. 공부는 하되 원리와 핵심을 이해하는 거죠. 어떤 분들은 "내가 배운 게 맞아, 역사 속에서 검증됐어" 하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해요. 다 좋은데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잖아요.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이 그 이후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요. 지금 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진화를 이루고 있고요.
그래서 이론을 통째로 외우기보다 그게 나오게 된 이유, 그 핵심을 이해해야 해요. 인간의 본능적인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그걸 이해하면 환경이 바뀌었을 때 이 본능이 어떻게 변할지도 예측할 수 있거든요. 공부 안 하는 사람은 너무 야생이라 몸으로 배우게 돼요. 저처럼요. 논문을 그렇게 봤으면서도 결국 몸으로 배웠죠.
한국판 페이팔 마피아를 꿈꾸며
Q. 대표님 전문 분야 중 하나인 중국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은데요, 중국 사업을 오래 해오셨는데 혹시 반복되는 실패나 성공의 패턴이 있을까요?
케이스를 모아보면 중국에서 성공한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사실 중국을 나쁘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사업 파트너로서의 중국 사업가들은 오히려 한국보다 합리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더 많다고 봐요. 고객을 진심으로 위하며 사업하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사드 시절에도 아예 중국에 들어가 현지 팬을 위한 콘텐츠를 고민했던 한국인 인플루언서들은 다 잘 사세요.

다만 많은 분이 중국은 인구가 많으니 1원씩만 팔아도 14억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가 합리적이지 않은 소비를 하겠어요. 중국인이 어떤 부분에 지갑을 여는지, 그 코드를 연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너무 커요. 그래서 저는 해외 사업에 신중론자예요. 반드시 로컬 파트너를 세팅해야 한다고 봐요. 결국 지갑을 여는 코드는 미묘한 거라, 그들이 지갑을 열 포인트를 정확히 클릭하려면 현지인 없이는 안 되거든요.
Q. 그 '코드'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걸 실감하신 일화가 있어요?
골프존 시절, 스크린골프장 비즈니스를 중국에 정착시켜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중국 북경의 골프 연습장에 갔더니 우리나라와 다르게 거기는 완전 고급 접대 장소였어요. 칸마다 통유리 룸에 최고급 소파와 양주가 있고, 술 마시며 비즈니스 얘기를 하다 한 명씩 나와서 골프를 치는 문화였죠.
반면 중국 다른 지역의 디스트리뷰터는 반년도 안 돼 30대를 판 거에요. 말도 안되는 숫자였는데 알고 보니 사업하는 분이 자기 별장에 한 대를 설치하고 친구들을 불러 보여준 거예요. "나 집에 이런 거 설치해놓고 노는 사람이야" 하고요. 완전 부자들의 허영 욕구를 자극한 거죠. 그걸 본 친구들이 모두 주문을 하게 되고 입소문으로 30대까지 팔게 된거였죠.
그래서 저는 중국 사업 경험이 꽤 있어도 절대 "중국 통"이라는 말을 안 해요. 5천만 인구의 우리나라에서도 "나 한국 통이야"라고 못 하는데, 14억 인구에 성마다 문화와 민족이 다른 나라를 어떻게 통달하겠어요. 그 지역의 코드와 분위기, 감정이 어떻게 흐르는지 센스하지 못하면서 통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Q. 요즘 한국도 글로벌 사업에 관심이 많다보니, 관련 컨설팅 제안도 많이 받으시겠어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윈윈 구조예요. 가끔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갑질하며 더 얻어가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너무 근시안적이에요. 우위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요. 윈윈이 돼야 지속되고, 레퍼럴도 되고, 제 평판이 되는 거죠. 제가 10년 넘게 찐친이 된 중국 파트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가족 안부를 묻는 친구 같은 사이지만, 결국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여야 그 관시도 유효한 거예요. 저는 '모든 길은 왜곡되더라도 결국 정도로 돌아온다'고 믿어요.
5번의 창업, 중국 콘텐츠 수출 사업, 10건+의 글로벌 디스트리뷰터·세일즈 에이전트 계약, 수백 스타트업 멘토링을 거쳐온 티그라운드 오제욱 대표와 직접 만나 글로벌 확장의 의사결정 순간들을 듣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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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지막으로, 대표님의 최종 목표를 여쭤보고 싶어요.
Y컴비네이터 같은 액셀러레이터 성격의 회사를 하고 싶어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국판 페이팔 마피아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업 모델을 만들고 검증하는 건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작 그걸 수행할 역량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 인재를 함께 양성해서 좋은 자리에 배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해외 거점에 삼계탕집 같은 검증된 비즈니스도 하고 싶어요. 하이디라오를 보세요. 로봇이 서빙을 하니 기존 서빙 인력은 야채를 썰어주고 말을 걸며 고객과의 인터랙션을 더 강화했잖아요. AI와 로봇이 사람의 일을 대체할수록, 사람의 온기는 더 그리워질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프라인에서 더 만나야 한다고 봐요.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요. F&B가 그런 경험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기본적으로 저는 누군가에게 가르쳐주고 도움이 되는 걸 좋아해요. 강의도 좋아하고 경험을 기꺼이 나눠주고 싶고요. 문제는 그냥 퍼주면 돈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버는 구조, 그런 걸 꼭 만들어 보고 싶어요.
OUTRO
오제욱 대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그 정신없어 보이던 점프들이 사실은 하나의 직선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도메인은 매번 바뀌었지만 그가 한 일은 늘 같았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가설을 세우고, 그게 진짜 돈이 되는지 검증하는 일. 그는 그것을 사업개발의 '본질'이라고 부릅니다. 본질을 붙들고 있었기에 낯선 시장에 매번 겁 없이 뛰어들 수 있었고, 또 그 본질 덕분에 어떤 영역에서도 같은 사람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길은 결국 정도로 돌아온다'고 믿는 것. 화려한 이력의 이면에서 그가 진짜로 쌓아온 것은, 어쩌면 이 담백한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자가 되고 싶고,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오제욱 대표는 그 무대를 혼자 빛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만든 사람들이 같이 올라서는 자리로 분명 만들어 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국판 페이팔 마피아라는 그의 꿈이, 그저 야심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편집・글: 이혜미 gbd.hyemi@gmail.com



